5월 1일.
퇴거 공지가 할렘의 곳곳에 나붙었다. 이럴 때 만큼은 주소지조차 유효하지 않은 건물들을 어찌나 꼼꼼히도 찾아다니는지, 할렘의 모든 건물이란 건물의 정문에 붙어 있는 종이들이 나부끼는 광경은 흡사 이름 모를 국경일을 축하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 종이쪼가리는 명백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헌터의 아이즈, 클라라 톰슨이 보기엔 그랬다. 그녀는 마치 그 종이가 증거품이라도 되는 양, 가장 가까운 철문에 나부끼는 퇴거 공지를 세심하게 뜯어내 품으로 갈무리했다. 본부로 향하는 걸음이 조금 빨라진다.
“뱀프 새끼들이 대체 언제부터 눈치를 챈 거지?”
“이번엔 대충 넘어갈 수 있는 길이 도저히 안 보이는데.”
“꼭 그래야 하나? 언제까지 도사리고 있을 거냐고. 이제 하운드도 넉넉한데, 저 새끼들 멱을 따버릴 때도 되지 않았냐.”
“어어, 얼굴 봐라. 벌써 주먹 쓸 생각하니까 좋아서 희희낙락하는 거지. 발끝까지 근육으로 꽉 찬 머저리새끼.”
본부의 입구부터 휴게실까지, 또 휴게실에서 회의실까지 헌터들은 온통 퇴거 공지 얘기뿐이었다. 언젠가는 한 번 벌어질 일이었다. 대비를 안 해 둔 것도 아니었다. 불쾌감, 흥분, 기대, 불안, 희망. 온갖 것이 섞여 들썩이는 공기는 슈퍼노바만큼이나 중독적이고 위태로웠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회의실은 익히 아는 얼굴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클라라가 회의실에 남은 그나마 멀쩡한 자리를 마지막으로 차지했다.
그녀는 뜯어낸 퇴거 공지를 철제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모두의 시선이 익히 목격한 그 종이에 날아들었다가 상석도 아니고 구석진 자리 - 그는 늘 그랬다, 권력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우리의 리더 - 의 그에게 가 꽂힌다. 자,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대장의 머릿속에 든 것을 알아낼 시간이다.
“전면전을 준비해.”
그의 말 한 마디에 탄식, 혹은 탄성이 좌중을 훑고 지나간다. 클라라는 잠시 눈을 감는다. 헌터 본부가 할렘에 자리잡은 이래로 이곳은 정겨운 그들만의 싸구려 낙원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초기의 몇몇 극단적인 행동파들이 하운드 실험에 아이들을 납치하면서 주민들과의 사이가 최악으로 치달았던 적은 있어도 제 살을 깎아먹는 짓을 못 하도록 규칙이란 걸 세우고 나서부터 할렘은 헌터의 둥지가 되어주었고, 헌터는 뱀파이어에 눈이 먼 공권력이 챙기지 않는 할렘의 모든 살림살이와 치안을 책임졌다. 실로 할렘에 살고 있으면서 헌터와 관련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그랬다. 그래서 그녀는 먼저 묵념하고 말았던 것이다. 수없이 스러질 그들의 목숨을 향해. 눈을 다시 뜨고 분위기를 훑기까지,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은 주마등이었다.
“이자벨, 하운드를 모두 소집해. 급한 임무를 맡은 녀석이 아니라면 모두 사흘 후에는 본부에 집합시켜. 벙커를 개방해서 아이들과 노인들을 들여. 어차피 무너질 건물에 남아 있는다고 그들에게 득이 될 건 없으니까. 자, 파피, 오늘부터 슈퍼노바의 공급량을 3할 늘린다. 판매 수익으로는 물자를 더 비축해 두도록 해. 릴, 그때 얘기한 무기 개조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모르겠군. 하운드에게도 도약력을 보장해줄 부츠가 꼭 필요해. 봉쇄선에 쓸 철조망엔 은도금만 해 둬도 제법 효과가 있을텐데, 이건 따로 좀 얘기해. 그리고, 클라라?”
“그래, 시커.”
“할렘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들의 목록을 받아 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모두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하지.”
당신에게 이런 일을 맡겨서 미안해. 그녀는 그가 생략한 뒷말도 물론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할렘에서 나고 자란 클라라에게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명령이자 부탁이었다. 또한, 그녀는 그의 제안이 도망치라는 권고보다는 함께 싸우라는 선동으로 가 닿을 것이라는 사실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범죄자, 이방인, 떠돌이, 변종보다 못한 인간 아래의 인간, 갱생 불가능한 쓰레기, 최악의 머저리와 골치아픈 뜨내기. 뱀파이어가 1등 시민, 뱀파이어를 보좌하는 이들이 2등 시민, 할렘의 주민들은 그 피라미드에조차 발을 들여놓지 못했으므로.
헌터는 할렘이 가진 모든 것이었다. 할렘은 헌터의 뿌리였다. 우리는 이 땅을 놓느니 죽는다. 그래서 여기에 깃발을 꽂고, 다가올 전란 앞에 목숨을 던진다.
뱀파이어들은 우리의 땅을 영원히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소집 명령을 받고 복귀했거나, 본부에서 일하던 하운드입니다. 혹은 6월 1일, 갓 하운드가 된 신참일수도 있겠네요.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누군가는 인간됨을 버려야만 합니다. 뱀파이어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뼛속 깊이 새긴 당신은 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뱀파이어들의 야망을 꺾고 헌터와 헌터의 도시를 지켜낼 것입니다.